Value of Life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 불국사 - 본문

유네스코 세계 유산/한국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 불국사 -

앵글메이커 2008. 8. 10. 20:39
반응형

불국사는 석굴암과 같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이 창건하여 서기 774년 신라 혜공왕때 완공하였다.

토함산 서쪽 중턱의 경사진 곳에 자리한 불국사는 심오한 불교사상과 천재 예술가의 혼이 독특한 형태로 표현되어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는 기념비적인 예술품이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지상에 옮겨 놓은 것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와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및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불국사의 건축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하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청운교, 백운교, 자하문, 범영루, 자경루, 다보탑과 석가탑, 무설전 등이 있는 구역이고 다른 하나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안양문 등이 있는 구역이다.

불국사 전면에서 바라볼때 장대하고 독특한 석조구조는 창건당시 8세기 유물이고 그 위의 목조건물은 병화로 소실되어 18세기에 중창한 것이며, 회랑은 196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불국사의 석조 구조는 길고 짧은 장대석, 아치석, 둥글게 조출된 기둥석, 난간석 등 잘 다듬은 다양한 형태의 석재로 화려하게 구성되었는데 특히 연화교와 칠보교의 정교하게 잘 다듬은 돌기둥과 둥근 돌난간은 그 정교함, 장엄함과 부드러움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불국사의 높이 8.2m의 삼층석탑인 석가탑은 각 부분의 비례와 전체의 균형이 알맞아 간결하고 장중한 멋이 있으며, 높이 10.4m의 다보탑은 정사각형 기단위에 여러가지 정교하게 다듬은 석재를 목재건축처럼 짜맞추었는데 복잡하고 화려한 장엄미, 독특한 구조와 독창적인 표현법은 예술성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불국사는 사적·명승 제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불국사내 주요 문화재로는 다보탑(국보 제20호), 석가탑(국보 제21호),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연화교와 칠보교(국보 제22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비로자나불(국보 제26호)등이 있으며, 불국사는 1995년 12월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 자세히 보기 ----

불국사

1.백운교
2.청운교
3.자하문
4.다보탑
5.석가탑
6.대웅전
7.무설전
8.비로전
9.관음전
10.연화교
11.칠보교
12.안양문
13.극락전


- 불국사-

1. 백운교 2. 청운교
청운교와 백운교는 독특한 형태의 계단으로, 지상에서 불국토로 인도해 주는 다리를 상징한다. 계단 중앙에는 분리대가 있어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을 구분하고, 계단 아래에는 아치형의 터널을 만들어 물이 흐르는 다리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이는 계단이 상징하는 수평 이동을 결합한 독특한 구성으로 지상과 천상, 강 또는 바다로 분리된 두 개의 세계를 연결하는 기발한 의장을 보여준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통해 중생은 석가정토로 인도되며, 좌측의 극락전이 있는 아미타정토에는 연꽃이 음각된 연화교와 칠보교를 통해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원래 불국사에는 13개나 되는 많은 다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다리' 모티브의 반복은 불국사의 불교적 의미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즉 『화엄경』에는 구름과 바다에 대한 여러 가지 메타포를 발견하는데, 비로자나불이 주관하는 연화장세계는 세계해에 비견되며 하늘의 구름과 바다의 무량함에 비유된다.



3. 자하문
청운교, 백운교를 오르면 불국 세계의 관문격인 자하문에 다다른다. 이 문은 가람 배치상으로는 중문(中門)에 해당되는 문으로 이 문을 통해야만 대웅전 일곽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이 문은 불국사 창건 때부터 세워졌겠으나 그 문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고 지금의 문은 여러 차례의 중건, 중수되었다고 전해오나 1966년 수리 때 발견된 자하문 상량문에 의하면 건륭 46년(1781)에 중수된 것으로 최종 기록이 발견되었다.

1973년 불국사 중창 복원 때 남회랑을 이 문에 붙이면서 측면 일부가 개조된 바 있다.
이 문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다포식 팔작집으로 도리칸 중앙열 기둥에 판문을 달아 개페하도록 하였다. 건물 기단은 야트막하게 마련하였는데 이는 대석단 위에 건물이 세워지므로 별도의 높은 기단이 필요가 없어 얕게 하였던 것 같다.



4. 다보탑 5. 석가탑
다보탑과 석가탑은 『법화경』의 '견보탑품'에 근거하여 건립되었다. 석가여래가 『법화경』의 진리를 설할 때 장엄한 칠보탑이 솟더니 그 탑 속의 다보여래가 석가여래에게 자리 반쪽을 비워 나란히 앉도록 했다는 것인데, 이는 석가여래 이전의 과거불이며 영원한 법신불인 다보여래가 석가여래의 법화경 설법을 찬양했다는 상징성을 띤다.

이러한 광경은 중국의 돈황과 운강석굴에 조각이나 회화로 많이 남아 있다. 한국의 경우 이 극적인 장면과 교리적 해석이 탑으로 변환하여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조성된 것이다.

다보탑은 정교하게 다듬은 여러 형태의 석재를 목조건축처럼 짜맞춘 것으로, 복잡하고 화려한 장엄미, 독특한 구조와 독창적인 표현법은 어느 나라에도 유례가 없다. 1925년 일제에 의해 전면 해체 복원되었으나 아무런 보고서도 남아 있지 않으며, 탑 속의 사리장엄구 또한 행방을 모른다.

석가탑은 통일신라 초기의 둔중한 석탑 양식에서 벗어나 쾌적한 비례를 적용함으로써 더욱 주상적이고 간결한 형태를 띠고 있다. 8세기 중엽 이후 조성된 석탑 양식은 모두 석가탑을 전형으로 삼고 있다. 1966년 상층부를 해체하였을 때 제2층 탑신부의 사리공에서 금동외함, 금동방형사리함, 은제 내·외 사리함, 동경, 옥류등 수십 종의 공양구와 세계 최고의 목판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designtimesp=20845>등이 발견됐다.

석가탑과 다보탑은 그 배치 또한 절묘한데 단순 소박한 석가탑은 복잡 화려한 범영루 뒤에, 복잡 화려한 다보탑은 단순 소박한 좌경루 뒤에 두어 균형과 대비를 이루게 했다.




6. 대웅전

대웅전은 대웅전 일곽의 중심 건물로 건물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主尊)으로 모셨다. 현재의 건물은 1765년(건륭30)에 중창된 것이며 기단부 및 초석 등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남아 있다. 건물의 규모를 보면 정면 5칸, 측면 5칸인데 당당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건물 기단은 높지도 얕지도 않은 알맞은 높이로서 4.2척 정도이다. 건물의 전체 높이는 43척(13미터)이고 기단 4면에 계단을 설치하여 건물로 오르게 되어 있다. 동·서 양 측면 중앙으로는 동·서회랑에서 꺾여 들어온 익랑(翼廊)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다포식 팔작지붕 단층 불전으로 18세기 중엽의 전형적인 구조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중앙부에 수미단(須彌壇)의 불단이 있고 그 위에 목조의 석가 삼존불이 안치되었다. 삼존불은 중앙에 석가모니불이 있고 그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이 협시하였고 다시 그 좌우에 흙으로 빚은 가섭(迦葉)과 아난(阿難)두 제자상이 모셔져 있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쪽이 약간 길지만 거의 정방형에 가깝고 불단이 뒤쪽으로 치우쳐 있어 내부 공간이 넓게 느껴진다. 내부에는 안두리 기둥을 둘렀는데 앞뒤쪽으로는 외두리 기둥 배열과 같게 기둥을 배치하고 측면 쪽은 기둥 1개를 생략한 이른바 감주법(減柱法)을 적용하여 공간을 넓게 하였다. 공포는 다포로 외3출, 내4출의 형식으로 외7포, 내9포작이며 살미 첨차는 초화무늬와 봉황머리 등을 조각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특히 평방에 돌출된 용머리가 인상적으로 보인다. 가구(架構)는 2고주 7량가로 고주 위에 대량을 얹고 대량 위에는 동자주를 얹고 종량을 놓아 판대공(板臺工)이 종도리(宗道里)를 받도록 하였다. 고주와 평주사이는 퇴량과 격량으로 연결시켜 내진과 외진이 결합되도록 하였는데 그 구성이 견고하게 짜였다.

천장은 우물 천장인데 층단식으로 중앙 쪽으로 높였다. 외관에서 보면 정면의 중앙칸이 다른 건물에서는 보기 드문 넓은 주칸 크기로 되어 있다. 협간(夾間)과 툇간(退間)에 비해 거의 2배에 가까운 주칸이라 시원스럽고 확 트인 느낌을 준다.




7. 무설전

무설전은 강당에 해당하는 건물로 현재의 건물은 1973년 중창 불사 때에 세워진 건물이다. 이 건물이 세워지기 전의 발굴 조사에 의해 평면 규모와 기단 내용이 밝혀졌다. 신축된 건물은 그 근거에 의해 기단과 평면이 확정되었다. 원래의 무설전은 어떠한 건축 모양이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건물에 대한 자료는 『불국사 고금창기』에서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을 믿는다면 불국사 경내에서는 가장 먼저 지어진 건물로 볼 수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왕명에 의해 무설전을 새로 짓고 그곳에서 『화엄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문무왕은 의상 대사와 그 제자 오진, 표훈 등 10명의 대덕에게 강론을 맡게 했다고 한다. 이 기록대로라면 불국사를 창건한 751년보다 훨씬 앞서서 세워진 건물이라 할 수 있으나 역시 불국사의 창건은 751년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므로 무설전은 불국사의 건물이기 이전의 건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무설전은 현재 볼 수 있는 그러한 규모가 아닌 좀 작은 규모의 건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불국사가 창건되면서 원래의 무설전은 확장되었을 것이고, 이 건물은 1593년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고 그 뒤 조선 숙종 34년(1708)에 중창되었으나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하지 않다. 이 건물은 한일 합방 이후까지도 있었던 것이 확실한데 어떠한 이유에서 없어졌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건물의 기능은 경론(經論)을 강술(講述)하는 장소이므로 건물안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으며 단지 강당으로서의 기능에만 충실했던 건물인 것 같다. 이 건물터의 발굴 조사에서 밝혀진 건물안의 강단(講壇)지대석을 보면 중앙에서 서쪽으로 약간 치우쳐 방형의 상태로 놓였던 것 같다.

무설전이란 강당의 건물명을 보면 설이 없는 전당(殿堂)이란 뜻인데 강당이면서 강의함이 없다는 건물명을 갖고 있음은 불교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설적인 명칭이기는 하나 불교의 오묘한 진리가 말을 통해 드러나지 않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8. 비로전

이 건물은 무설전 후방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화엄경』사상에 따르면 비로자나불은 모든 부처님의 본체 곧 진리의 몸이다. 바이로챠나 또는 비로챠나란 산스크리트 말을 한자음으로 음역하여 비로자나 또는 비로사나라 부른다. 이 뜻은 '빛을 발하여 어둠을 쫓는다'는 뜻이다.
비로전은 751년에 창건되고 1593년에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린 뒤 현종 원년(1660)중수되었으나 그 뒤 황폐되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73년 중창 불사 때에 다시 새롭게 지은 건물이다.

중창 전 이 건물터는 발굴 조사를 통해 평면 규모 및 그 내용이 밝혀져 그 근거에 의해 평면이 복구되었으며 지상 건물은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어 고려시대 건물 양식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이 건물에는 극락전에 있었던 높이 1.8미터, 폭 1.36미터의 금동제 비로자나불이 안치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인데 정면이나 측면 모두 어간을 양 옆의 협간, 툇간보다 훨씬 넓게 잡아 대웅전이나 극락전과 같은 주칸 크기비를 보인다. 이 건물에서도 뒷면은 정면 쪽보다 1칸 많은 6칸으로 되었다.

건물 내부에는 앞뒤에 각각 2개의 안두리 고주를 세웠는데 이는 철저히 감주법(減柱法)을 채용한 예라 할 수 있다. 공포는 주심포형식으로 고려기에 많이 사용된 형식을 취하였고 가구는 2고주 9량가로 대·중·종량의 삼중보를 얹은 형식이다. 또한 감주로 인해 내부 측면 1칸이 고주 없이 보가 가로질러 가야 하므로 측면에서 고주(高柱)로 향하는 퇴량이 그 부재의 퇴량이 되고 거기에 대량을 끼워 맞추는 형식으로 되어 다른 건물에서 별로 보이지 않는 구조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9. 관음전

관음전은 무설전 후방 동쪽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원래는 751년에 창간되었으나 그 뒤 조선 성종 원년(1470)에 중수되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던 것을 선조 37년(1604)에 해청스님이 중창했고 그 뒤 다시 숙종 21년(1695), 44년(1718)에 두차례 중창되었다가 그 뒤에 어느 때인지 없어진 것을 1973년에 새로 복원하였다.

원래 이 건물 안에는 관세음보살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 관음상은 신라 경명왕 6년(922)에 경명왕비가 낙지공(樂支工)에게 명하여 전단향목으로 만든 것이었다고 한다.

이 관음상은 조선 현종 15년(1674), 숙종 27년(1701), 영조 45년(1769)의 세 차례에 걸쳐 개금(改金)되었다고 하나 그 이후 없어졌다고 생각된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거의 정방향의 건물이다. 내부에는 안두리 기둥이 4개 있고 다포식의 사모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건물 역시 정면이나 측면의 어간이 양측 주칸에 비해 2배 가까이 되어 중앙칸을 특히 강조한 느낌이 들며 이로 인해 구조적으로는 어간에 무리가 간다고 생각되지만 정면이나 뒷면 어간에는 문선을 샛기둥과 같은 역할이 되도록 튼튼한 부재를 사용하여 이를 보완하고 있다.

공포는 내외 2출목의 5포작으로 외부 살미는 견실한 쇠서형을 조각하고 내부는 교두형으로 하였다. 가구 형식은 2고주 5량가로 하고 종량 위는 심주를 세워 절병통의 심주로 하고 이곳에 추녀 뿌리가 모이도록 하였다. 천장은 내진에 우물천장, 외진은 빗천장으로 하고 바닥면에는 전돌을 깔았다.




10. 연화교 11. 칠보교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극락전의 안양문으로 오르는 연화교·칠보교는 자하문으로 오르는 청운교·백운교와 모습이 비슷하지만 경사를 훨씬 원만하게 처리하여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을 준다.

연화교는 돌계단에 연꽃잎을 새기고 중앙에 바둑판 모양의 무늬를 이어 놓았으나, 칠보교는 연꽃 조각이 없으며, 계단의 양쪽 난간에 정교하게 다듬은 돌기둥 네 개를 세우고 그 사이를 둥근 동난간으로 연결했다.




12. 안양문

안양문은 극락전 일곽의 중문으로 안양이란 극락 정토의 이명(異名)이다. 현재의 안양문은 1960년에 중건한 건물로 새로 지어진 것이며 건축 양식은 고려 양식으로 되었다. 「고금창기」에 보면 6칸 건물로 되었고 전·후행랑 26칸이라 하였는데 이 행랑이 안양문 좌우에 연결된 회랑인 것 같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6칸 문이며 주심포식으로 꾸며졌다.

지금의 안양문이 있기 전에 자그마한 규모의 건물이 있었으나 퇴락이 심하고 규모도 이 사찰에는 맞지 않는다는 판단에서 헐린 것 같다. 현재의 건물은 고(故) 임천 선생께서 설계한 건물로 강릉 객사문과 도갑사 해탈문(解脫門)을 참고한 것이다. 이 건물의 공포는 주심포식으로 헛첨차를 기둥머리에 꽂은 형식으로 1출목 주심포식으로 되고 가구는 5량가인데 문을 달기 위해 대량 중앙에 기둥을 받치도록 하였다. 종량은 이중으로 하고 대공은 모두 화반 대공으로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유행하던 조각 형식을 모방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되었다.




13. 극락전

이 건물은 극락전 일곽의 중심 건물로서 건물 안에는 아미타여래를 봉안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뒤에 영조 26년(1750)에 오환, 무숙 등에 의해 중창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5년 일제 때에 중수되었지만 중창 때의 모습에 비해 큰 변화가 없는 것 같다.

건물 내부의 불단은 중수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한다. 건물 내부에는 현재 아미타여래 좌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이 불상은 금동불로서 높이 1.8미터, 양 무릎의 너비는 1.25미터이다.

이 극락전 건물은 평면 규모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3.5척의 기단 위에 총높이 30.33척 크기의 건물로 정면이 측면보다 8척 정도 작은 정방형에 가까운 건물이다. 이 건물의 평면에서의 특이한 점은 뒷면의 도리칸 주칸은 정면과 달리 4칸으로 한 것이며, 정면에서도 3칸이기는 하나 중앙칸에 2개의 샛기둥을 넣어 5칸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이는 아마 중앙칸의 크기가 18척이나 되는 긴 주칸이라 위에서 오는 하중을 받기에 좀 무리라고 생각되어 보조적 기둥이 필요하였는지 모른다.

공포는 다포식으로 내외 모두 2출목을 낸 5포작으로 살미 첨차에는 초화무늬와 봉황 머리를 조각하여 과치장(過治粧)을 한 느낌을 준다.

가구 형식은 2고주 5량가 형식으로 고주머리에 퇴량을 얹었고 고주의 위에는 일반적으로 대량을 얹는 것이 상례(常例)이나 이 건물에서는 고주 위에 초화각 판재를 얹어 종도리를 그 위에 놓게한 특이한 수법을 써서 내부 공간의 활용을 최대한 넓히려 시도하고 있다.



반응형